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차(고대 무기) (문단 편집) == 발전 과정 == || [[파일:War_Chariot.jpg|width=100%]] || || 수메르의 사륜 전차 || 전차 그리고 [[수레]]의 기원은 기원전 20세기 시베리아 서쪽 우랄 산맥 인근으로 추정되며 최초의 사용자들은 얌나야 문화로 대표되는 [[원시 인도유럽인]]으로 여겨진다. 이후 약 기원전 17세기부터 메소포타미아 등 다른 지역에 전차 기술이 확산 된 것으로 추정된다.[* 강인욱, '테라 인코그니타', 창비, 2021, 190p] 전차는 동물이 끄는 수레를 개량해서 전투용으로 쓴 것이 시초다. 때문에 초창기 수레처럼 바퀴가 4개였으나 두 바퀴가 조향(옆으로 회전하는 것) 성능이 더 좋음을 알고 두 바퀴 전차가 일반화되었다. 끄는 동물도 초기에는 [[소]]가 끄는 수레 같은 물건이었으나 점점 발달하면서 당나귀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2~4마리의 [[말(동물)|말]]이 끄는 형태로 보편화했다. 일반적으로 말 2마리가 끈다면 한두 명이 타며(1명이 타면 연락병 등의 단순한 이동용이고 일반적인 전투용은 2명), 4마리가 끈다면 3~4명이 탄다. 1명은 마부이며 자주 [[방패]]를 들고, 나머지는 [[활]]이나 [[창(무기)|창]] 등의 병기를 썼다. [[이집트]]의 2인승 전차는 마부도 고삐를 허리에 매고 활을 쏘는 그림이 있는데, 돌격 시가 아닌 사격 시에는 말 다루기가 쉬웠던 듯하다. 4두 전차는 싸우는 자들보다 마부가 더 좋은 급료를 받았는데, 당연히 여러 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다루기가 힘들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. 한문에는 4두 전차, 또는 그 4두 전차를 끄는 말 4마리를 가리키는 '사'(駟)라는 단어가 있다.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Hittite_Chariot.jpg|width=100%]] || || 히타이트의 전차 || 전차의 최고 전성기는 기원전 1000년경으로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서 [[카데시 전투|전차 6000여 대가 맞붙는 초대형 전투도 벌어졌다]]. 양 군대 전차의 차이를 보자면 이집트 전차는 몸체의 중간이 아닌 뒤쪽에 있던 바퀴의 축이 좌우로 길어서 선회가 훨씬 쉬웠다고 하며, 히타이트 전차는 3명이 탔다고 한다. 비슷하게, [[미케네 문명|뮈케나이 문명]]에서도 전투의 주력은 병거가 차지했고, 보병은 보조 병과에 머물렀다. >그리스의 청동기 무덤은 부유한 미케네 남자의 시신은 그의 전투 장비와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보여준다. 펠로폰네소스 북동쪽 덴드라의 무덤에서 기원전 14세기의 미케네 청동 갑옷 한 벌이 발굴되었는데, 이 갑옷은 부유한 개인의 장비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. 이 죽은 전사는 청동 흉갑(가슴받이와 등받이),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청동 앞치마, 청동 정강이받이, 어깨받이, 빗장뼈받이를 갖추고 있었다. > >...이 남자와 같은 복장을 한 미케네 전사들은 최신식 군사 장비를 갖추고서 전투에 참여하는 셈이었는데, 그들은 주로 말이 끄는 가벼운 이륜 마차를 타고 다녔다.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, 중앙아시아에서 흘러들어 온 인도-유럽인들이 도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혁명적인 수송수단(전차)은 지중해의 여러 사회와 근동 사회에서 기원전 2000년 직후에 등장했다. 에게 해 근방에서 이런 전차가 처음으로 묘사된 것은 기원전 1500년경의 미케네 벽화에서다. 부유한 사람들은 앞 다투어 이 멋진 신병기를 입수하여 전투용으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의 증거물로도 활용했다. 이런 점은 현대인들이 승용차가 등장하자 그때까지 사용하던 마차를 내던지고 너도나도 승용차를 구입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. > >덴드라에서 발굴된 갑옷은 전차를 타고서 전투에 참여하는 전사용이지 보병의 장비는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. 그런 주장이 나온 근거는 보병이 그런 무거운 금속제 갑옷을 입고서는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. 이 주장에 따르면, 궁사들을 싣고 다니는 전차가 미케네 군대의 주력 부대이고 보병은 전투의 보조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. 2차 세계 대전 당시 움직이는 대포인 탱크가 앞장서서 나가면 그 뒤를 보병이 따라간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. 그래서 미케네 보병들은 전차 부대를 호위하면서 후방 진지를 경비하고, 전차 부대들끼리 충돌한 후에 달아나는 적병들을 추격하고, 전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에서만 공격 부대로서 활약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본다. 그리고 미케네 시대의 보병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고용한 용병이었을 것이다. >---- >-Thomas R. Martin 지음, 이종인 번역, 《고대 그리스사》 69-71쪽 || [[파일:eb51_55_i1.jpg]] || || 중국의 전차 ||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의 중국에서도 병거, 융거(戎車)라고 부른 전차는 군사력의 핵심이어서 [[주나라]]부터 '전차의 보유수=군사력'으로 간주해 춘추시대 손무는 자신의 저서 [[손자병법]]에서 천자는 만승(전차 1만 대), 제후는 천승(전차 1천 대)으로 규정하고 있다. 전차는 보통 갑옷 입은 병사 3인이 승차하고 [[과(무기)|과]], [[극(무기)|극]], [[철퇴|수]] 등의 공격용, 호신용 무기와 백패(白旆, 끝이 갈라진 흰색의 깃발)를 장착하였다. [[고조선]]도 전차부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한무제 침공 초기에 전차와 기마 부대를 활용하여 격퇴하였다. 평안북도에서 출토된 고조선 시대의 분묘에서 2두 전차의 마구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. 이 유물이 상당히 의미 있는 게, 당시 고조선의 기술 수준이 뛰어났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. 고대에는 수레나 그 바퀴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하이테크로 분류되었다. 제나라 환공과 수레바퀴 장인 윤편의 일화만 봐도 잘 알 수 있다. 또한 [[광주 신창동 유적|광주광역시 신창동의 마한 유적지]]에서 말이 끄는 수레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바퀴통과 바퀴살, 바퀴축 등의 부속품이 대거 출토되면서, 고대 한반도의 나라인 [[마한]]의 백성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.[[https://news.v.daum.net/v/20121212010007982|광주 신창동은 고대사 타임캡슐]] || [[파일:external/www4.uwm.edu/fig12.jpg|width=100%]] || || 켈트족 전차의 설계도 || [[켈트]]족도 전차를 애용했는데 특이하게도 전투용만이 아닌 위급한 전선에 신속하게 고위 전사를 파견하고 부상당한 전사를 안전하고 빠르게 후송하는 일종의 [[병력수송장갑차|전장 택시]]같이 운용되었으며 그래서 [[켈트 신화]]에선 [[쿠 훌린]]을 비롯해 신화속 영웅들의 상당수들은 본인만의 전용 전차를 보유한 것으로 묘사된다. 라틴어로는 이런 켈트식 수레를 카루스(carrus)라고 불렀는데 이 또한 켈트어에서 차용한 외래어이다. 초기 전술은 활로 적을 제압하고 튀는 일격이탈 전술이 대세였으나 말의 품종 개량과 승마술의 발달로 근본적으로 기동력이 처지는 전차는 기병에게 밀렸고, 그 결과 일격이탈전술을 포기하고 역으로 전차의 무게를 늘려서 충격력으로 승부를 하는 식으로 바뀌었다. 최종적으로 [[낫전차]]처럼 충격력에 몰빵한 돌격형 전차가 되었고 늘어난 무게를 감당하러 도태되었던 4륜 전차가 되살아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